
생물학적 노화와 유전자
어느 날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숯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백발노인이 젊은이에게 왜 숯을 씻느냐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숯을 하얗게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기가 막혀했습니다.
그 모습에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노인을 포박했습니다.
알고 보니 젊은이는 저승차사 인 강림도령이었는데 노인은 그 유명한 삼천갑자 동방삭이었습니다.
한 갑자가 60년에 해당되니 이때 동방삭의 나이는 무려 18만 살이었다고 합니다.
불로불사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설화 속의 인물 동방삭뿐만 아니라 숱한 역사적 사실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제주도의 서귀포라는 지명은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라는 사람이 불로초를 찾다 포기하고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한나라 황제 한무제 또한 불로불사의 선약을 원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섭리 앞에 자신만은 예외이고 싶었던 절대 권력자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병들었으며 죽어 갔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노화란 나이가 들면서 신체 기능의 효율이 떨어져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성공적으로 번식할 확률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외부와 차단된 닫힌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물질과 에너지를 계속
교환해야 합니다.
원리적으로는 주변 환경에서 양분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얻고 노폐물을 배출할 수 있다면 영원한 생존도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세균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반드시 노화합니다.
살아 있는 세포가 생활사의 예정된 시기에 노화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모든 생물의 공통점입니다.
노화의 원인을 밝힌 이론들은 많이 있습니다.
특히 노화의 진화 이론은 진화론적 입장에서 노화 현상을 다룹니다.
여기서 노화는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자연의 무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연선택은 노화보다 번식에 관심을 둡니다.
유전자는 자손을 통해 전달됩니다.
자손을 많이 낳을수록 유전자를 더 많이 퍼트릴 수 있습니다.
번식에 성공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며 번식에 도움이 되는 유전자는 자연선택에 의해 더 많이 살아남습니다.
문제는 번식을 목표로 생식기를 만들고 건장한 체격과 임신을 가능하게 했던 유전자가 삶의 후반부에는 노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선택은 번식에 도움이 되는 유전자를 선택할 뿐이지 이것이 암을 비롯한 각종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인지 아닌지 젊을 때는 알지 못하며 사실 별 관심도 없습니다.
진화 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스의 <다면 발현 가설> 은 이러한 관찰에 이론적 바탕을 둡니다.
다면 발현은 한 유전자가 두 가지 이상의 효과를 갖는 것입니다.
다면 발현 유전자는 동전처럼 앞뒤가 다른 유전자입니다.
삶의 전반부에는 이롭지만 삶의 후반부에는 해로운 그런 유전자입니다.
다면 발현 가설의 적절한 예시로 남성 호르몬의 일종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촉진하는 유전자를 들 수 있습니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자아이가 빠르게 성장하고 건강한 체격을 갖게 만들어 생존을 유리하게 만들지만 나이가 들수록
거꾸로 생존을 위협합니다.
과다 분비된 테스토스테론은 나이를 먹을수록 전립선암 발병 위험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하는 유전자는 젊은 시기에 자손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번식상의
이득이 늙은 시기에 수명이 짧아질 수 있다는 생존 상의 손실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노화를 늦추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형질은 번식이 가능한 나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확인 가능합니다.
자연선택은 설사 나중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삶의 이른 시기에 이로운 효과를 나타내는
다면 발현 유전자를 선호합니다.
값비싼 대가는 나이가 들수록 누적되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모든 신체 부위가 퇴화하는 현상 즉 노화로 나타납니다.
물론 다면 발현 유전자는 노화 유전자가 아닙니다.
노화 또한 자연선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면 발현 유전자를 선택한 결과로 삶의 후반부에 노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생물의 노화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은 노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노화의 원인과 텔로미어
노화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노화를 늦추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졌습니다.
노화의 원인이 다양한 만큼 그 해결법 또한 다양합니다. <노화시계>로 불리는 텔로미어에 대한 연구는
그중에 하나입니다.
텔로미어는 그리스어로 <끝>을 뜻하는 <텔로스>와 <부분>을 뜻하는 <메로스>에서 유래한 말로 염색체의 양쪽 끝에 붙어있는 특정한 DNA 염기 서열을 가리킵니다.
염색체의 끝부분은 효소들의 공격을 받아 망가지기 쉬운 부분인데, 텔로미어는 신발 끈이 풀어지지 않도록 끝에 붙인 짧은 빨대 모양 플라스틱처럼 염색체를 효소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텔레미어는 단백질 합성과 상관없는 의미 없는 DNA 염기서열을 수십 번에서 수백 번 이상 반복하는 구조를 갖습니다.
진핵생물의 텔로미어 염기 서열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나 쥐를 포함한 척추동물과 붉은 빵 곰팡이의 텔로미어는
TTAGGG를 반복하고 애기장대는 TTTAGGG를 반복합니다.
텔로미어의 길이는 생물종마다 다른데 효모의 경우 300~600개, 사람의 경우 수천 개 이상의 염기를 갖습니다.
텔로미어는 일종의 타이머 역할로 세포 분열이 가능한 횟수를 알려 줍니다.
세포 분열을 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지며, 사람의 경우 한 번에 50~100개의 염기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텔로미어가 지나치게 짧아지면 세포 분열이 멈추고 세포는 사멸하게 됩니다.
생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평균수명을 견딜 만큼 충분한 길이의 텔로미어를 갖고 태어납니다.
복제 포유동물과 수명
간혹 예외도 있습니다.
최초의 체세포 복제 포유동물인 돌리는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할 무렵 세포의 나이는 이미 여섯 살을 넘겼습니다.
그 이유는 돌 리에게 체세포를 떼어 준 어미 양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십 번의 세포 분열을 거치면서 짧아진 텔로미어를 어미 양으로부터 그대로 받아 온 돌리는 여섯 살의 나이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양들의 평균 수명인 12년에 훨씬 못 미치는 7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돌 리에게 닥친 단명의 원인 중 하나는 텔로미어에 있습니다.
어미 양의 체세포를 바탕으로 돌 리가 만들어졌을 때 텔로미어가 짧았던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섯 살이었던 어미 양의 나이가 텔로미어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체세포 복제 동물에서 이런 현상이 관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개나 생쥐는 체세포가 복제될 때 텔로미어의 길이가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종마다 다르기 때문에 텔로미어가 길다고 해서 무조건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텔로미어가 짧아질수록 세포가 분열할 수 있는 횟수가 적어지며 이것이 노화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건강 수명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건강 수명은 병든 기간을 제외한 기대 수명입니다.
한국인의 건강 수명은 2012년 65.7년에서 2016년 64.9년으로 오히려 나빠졌다고 합니다.
즉 사는 날이 늘어났지만 병상에 누워 지내는 날은 더 많아진 것입니다.
각종 현대 기술로 수명을 연장시켰지만 노화는 어쩔 수 없는 일 있은가 봅니다.
노화를 막으려 노력하고 늦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사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오래 기억되는 삶을 사는 것은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고려 말 선비 우탁의 시조입니다.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치면서 늙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지만 노화는 어찌나 빨리 찾아오는 모릅니다.
자연이 선택한 노화는 그렇게 세월의 지름길로 오는 것임을 1000년 전의 우탁도 깨달았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삼천갑자나 살면서 세상 만물의 이치와 생사의 도에 통달했을 동방삭이 강림도령의 얄팍한 수에 깜빡 속아 넘어간 이유가 새삼 궁금해집니다.
혹시 그냥 속아 준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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